리뷰 - 정유정의 '종의 기원' - 길고 긴 유진 자신의 변론서

저는 유진이가 불쌍했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느낌... 자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군가가 매일 흩고 지나가는 느낌은 누군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기분 나쁘게 몸에 남아있었을 거예요.

 

그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약'을 적당히.. 버리기도 하면서 자신을 찾고 싶었을 거고요.

 

마치 영화의 도입부처럼 주인공인 유진이가 누군가에 의해 온 몸에 피칠이 된 건 아닐까.. 왜 이 아이가..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나가는 아이가 온갖 비난의 중심에 서 있어야 했을까... 계속 궁금증을 갖고 읽어나가게 됩니다.

 

​읽으면서 '이 아이는 아닐 거야'라는 기대를 점점 무너뜨리는 건 유진의 솔직한 기억의 떠올림에 있었습니다.

 

​간밤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어머니가 죽게 된 과정을 스스로 현장 검증하고 또 동기를 차근차근 밝혀냅니다. 물론 아주 근본적인 동기는 어머니의 일기인지 메모에서 확인하죠.

 

​그 메모를 확인하면서 유진이는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줍니다.

 

​형인 유민과 아버지가 죽게 된 과정을 저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본 어머니의 시각이 아닌 '서바이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 형을 따라간 유진의 입장에서 말이죠.

 

​유진의 어머니는 순간순간 아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을 때 왜 묻지 않았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라이벌로 느꼈던 동생의 기분 나쁜 진단 때문이었을까요.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페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근데 말이죠...

 

​저라면 최소한 두세 병원은 더 찾아가서 검사를 다시 했을 거 같아요. 뭐 대단한 자매 사이도 아닌데 한 번의 진단으로 자기 아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나요. 자신의 병원 손님이 언니를 더 젊어보인다고 했을 때 여과없이 드러낸 불쾌감, 성장 과정에서도 언니를 썩 좋아하지 않았던 일화들을 보면 저는 오히려 유진의 이모가 '사이코패스' 같았어요.

 

그래서 단 한 번의 검사로 내 아이에게 저런 폭력적인 진단을 내렸다면, 

 "이 미친년아. 네 말이 다 맞니! 최소한 한 번은 더 검사해 보자, 라고 해야 맞지 않니!"라며 다 뒤집어버렸을 거 같아요.

 

​어쨌거나 운명의 장난은 계속되고 하필이면 어머니를 살해한 날이 유진이 로스쿨 합격 발표를 확인하는 날이었답니다.

 

​어구야..

생면부지의 '오뎅'을 살해하고 그 모습을 본 어머니의 입에서

 

"너는... 유진이 너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라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큰 아들 유민이와 남편을 잃은 후부터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어쩌면 정신과 의사인 이모의 '처방'이 불안하게 똬리를 틀고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럴줄 알았어.'라며 불긴 한 예감은 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죠.

 

​유진이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자신 있어했던 수영을 강제적으로 그만 둘 때도, 9시 통금시간을 넘겨 귀가할 때도.. 무조건 불안해하는 어머니의 말을 따라야 했답니다.

 

​유진이는 그러다가 피고를 변론하는 변호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친족살인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유무죄가 아니라 형량을 정하는 쪽이라는 데에 말이죠. 그 과정에서 범인의 연령, 지능과 환경, 동기, 범행 후 정황.. 등 '도덕'과 '어떤 삶'을 그려나가는 데 관심을 갖고 변호사가 되기로 합니다.

 

​이 책은 어쩌면 유진이 자신에 대한 변론서를 쓰기 위한 자료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래도 유진은 최소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자신의 범죄를 사실로 다 적시하고 1년 동안 새우잡이 배를 타면서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 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도피 후 1년. 생각지도 않게 사건은 유진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유진이 로스쿨 합격도 했으니 돌아온 탕자로 살인사건의 변호를 계속 맡는 인물이 되지는 않을까.. 상상해봅니다.